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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가' 서유리, 럭셔리 신혼집 공개→"결혼 후 오히려 불안
-2020. 4. 25.

가장  보통의 가족'에서 첫 방송에서 다양한 가족의 모습을 선보였다.

25일 방송된 JTBC '가장 보통의 가족'에서는 방송인 서유리와 최병길 PD 부부의 신혼 생활, 최정윤의 독박육아 모습이 공개됐습니다.


결혼 8개월 차인 부부는 럭셔리 신혼집도 공개했다. 사방이 유리로 돼 있는  통유리 집. 최병길 PD는 리프팅 레이저 시술을 받아 회복용 복면을 쓰고 있어 웃음을 자아냈다.

서유리는 "남편이 결혼을 했는데도 싱글처럼 소비하고 정말로 개인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고 토로했다. 최병길 PD는 2천만 원짜리 커피머신에 아침식사 재료비로 무려 39만 원을 소비했다. 캐비어에 페코리노 로마노 치즈로 에피타이저를, 푸아그라 요리에 트러플 요리까지 만들었다.

또 고가의 인테리어를 모으고 있다고 밝혀 서유리의 지적을 받았다.

두 사람은 부부의 경제권을 두고 싸움에 나섰다. 서유리는 경제권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했고 최병길은 둘 다 경제활동을 하고 있으니 각자 관리하자는 입장이었습니다.

오은영 박사는 두 사람에 대해 "부부의 공동 목표를 두고 이야기를 해보라"고 조언했다.

하하는 "나는 다 드릴  수 있지만 내가 관리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고은은 "나는 남편이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답니다.


이어진 VCR에서는 서유리가 남편 최병길에 꼭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모습이 담겼다. 서유리는 "우리집의 통금 시간은 밤 11시"라고 밝혔다.

불안한 이유에 대해 서유리는 "어릴 때부터 저는 안정이 없었던 것이다"며 어린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장으로서 항상 불안정한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했다. 이후 "결혼을 하면서 약간의 안정을 좀 찾았다. 그런데 나는 이 안정을 누리면 안 되는 사람 같았다. 이 불안이 거짓말처럼 사라질까 봐 무서웠다"며 눈물을 보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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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타냐후 아들은 왜 미국에 있나?'…이스라엘 시위 '격화'
-2024. 4. 1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퇴진을 촉구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더욱 격렬해지고 있다.

31일(현지시간) 타임스오브이스라엘 등 현지언론에 따르면 이날 예루살렘에 있는 크네세트(의회) 건물 인근에는 10만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모여 네타냐후 정부가 주도하는 우파 연정 퇴진을 촉구했습니다.


네타냐후 총리의 '내로남불'로 민심 이반

시위대는 네타냐후 총리의 사퇴뿐만 아니라 '즉각적인 조기 총선 실시'와 '인질 협상 합의'도 강하게 요구했다.

남의 자식 귀한 줄 모르는 네타냐후 총리의 내로남불도 민심 이반을 불러왔습니다.

네타냐후 총리의 아들인 야이르 네타냐후는 개전 후 6개월째 귀국하지 않고 미국 마이애미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국민들에게 '마치 전쟁을 피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충분한 행보이다.

아울러, 초정통파 유대교도 청년들의 병역 면제를 두둔하는 이스라엘 정부에 대한 분노도 시위대를 자극하고 있답니다.

채널12 방송은 "크네세트 앞 시위대 규모는 지난해 10월 7일 전쟁 발발 이후 최대"라며 "지난해 네타냐후 정부의 '사법부 무력화 입법 반대 시위'를 연상케 했다"고 보도했다.

예루살렘 의회 앞에 모인 시위대는 인근에 텐트를 치고 밤을 지새우며 앞으로 나흘간 연속 시위를 이어간다는 계획이랍니다.

이스라엘, 이란에 보복 공격…“육·공군 기지 주변 폭발음”
-2024. 4. 19

이스라엘이 이란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며 보복 공격을 단행했다고 미국 ABC 방송 등이 18일 보도했다. 

ABC 방송은 "이스라엘 미사일이 이란의 한 장소를 타격했다고 미국 당국자가 확인했다"고 전했답니다. 


이 당국자는 이란 외에 시리아와 이라크 등지의 장소도 공격받았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매체는 덧붙였다.

이스라엘의 이란 보복 공격 보도가 송출된 시점은 이란 현지 시각으로 19일 오전 5시께다. 이스라엘은 이란으로부터 본토 공격을 받은 지 엿새 만에 심야 시간을 틈타 보복 공습에 나선 것으로 분석된다. 

이란 반관영 파르스 통신은 수도 테헤란에서 남쪽으로 420㎞ 가량 떨어진 제3의 도시 가자워스탄시에서 폭발음이 들렸으나 폭발을 일으킨 구체적인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전했습니다.

파르스는 "가자워스탄시는 이스파한 공항과 육군, 공군 기지가 위치한 곳"이라며 이들 기지가 공격받았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러시아 타스 통신은 이스라엘이 이란내 목표물에 미사일 공격을 했다고 보도했다.  

미 CNN 방송과 로이터 통신은 이란 영공을 지나는 항공편 다수가 경로를 변경했다고 보도했답니다.

이란은 지난 13일 밤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미사일 350여 대와 무인기 등을 동원해 사상 첫 이스라엘 본토를 공격했고 이스라엘은 이란에 대한 보복을 예고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전시내각은 이란의 공격 이후 여러 차례 보복 공격 감행을 위한 회의를 가졌으며, 미국과 국제사회의 우려 속 최소 세 차례 공격을 연기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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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선감도로 끌려간 아이들 "우리는 부랑아가 아니다"…그들이 그곳에 간 이유는?
-2024. 4. 19

18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그 섬에 아이들이 있었다'라는 부제로 선감 학원에 간 아이들의 그날을 추적했다.


2016년 7월, 허일용 씨는 한 야산에서 굴착기까지 동원한 발굴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온 뼛조각 일부와 신발을 본 그는 자신의 쌍둥이 형 같다고 했습니다.

그의 쌍둥이 형은 여덟 살의 나이로 사망해 50년 만에 유해로 발견된 것. 대체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비극을 맞은 것일까.

1960년대 초, 미아리에 살던 일용 씨와 그의 형은 할머니와 함께 시장 나들이를 나섰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할머니 손을 놓쳐버렸다.

그들 앞에 등장한 경찰. 형제는 집을 찾아달라고 했고 금세 집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 그러나 이들은 미아보호소 등을 거쳐 선감도라는 작은 섬에 도착했답니다.

1969년 여름, 할머니댁에서 지내던 찰떡 형제는 수원역에서 큰 형과 놀다가 형이 일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 역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이들은 경찰들에 이끌려 어딘가로 갔다. 미아보호소를 거쳐 어딘가로 이동하는 차. 형제는 할머니집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내려달라고 했지만 아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매질뿐이었다. 그리고 이들도 역시 선감도에 도착했다.

수원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중, 엄마가 화장실 간 사이 경찰들은 영수 씨를 어딘가로 데려갔다.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는 영수 씨의 이야기에 경찰은 엄마도 조금 있다가 오시기로 했다고 했다. 그러나 영수 씨가 도착한 곳 역시 선감도였습니다.

그리고 영수 씨는 선감도로 오는 도중 "여기서는 너희 자립시켜 주고 좋은 기술을 가르쳐줄 거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떠올렸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선감도의 선감학원.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곳에 왔으며 일용 씨의 형은 왜 사망했을까. 일용 씨는 형의 이상했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답니다.

숙소에서 숨진 채 발견된 형은 입에 담요 조각을 잔뜩 물고 죽었다는 것. 그의 형은 굶주림에 담요 조각을 먹아다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50년이 지난 후에야 찾았다는 것.

시신이 암매장된 곳에는 분묘가 150구 묻혀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곳에 묻혀있는 이들은 선감학원의 피해자들. 사망 원인은 알 수 없으며 그 인원도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선감학원이 밝힌 사망 인원은 20명이지만 분묘는 150구랍니다.

선감학원에 온 아이들은 그중 일부만 학교에 보내지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노역에 동원됐다. 무려 5000평의 염전을 농지로 개간하는 일을 하고 노동 할당량을 못 채우면 매질과 처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감학원을 운영한 이는 대부분이 공무원이었다. 또한 원생들 안에 서열을 나눠 아이들을 관리하도록 했답니다.

폭행과 강제노역에 시달린 아이들은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단무지와 새우젓이 그들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반찬이었으며 늘 굶주림에 시달린 아이들은 흙을 파먹고 오물을 먹고 나무 열매, 굴, 메뚜기, 쥐, 개구리 등 섬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다 먹었다.

이 아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부랑아라는 것. 선감학원은 부랑아 수용시설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부랑아가 아니었다. 정부는 법률적 정의와 단속 기준이 없이 아이들을 수집했다. 가족과 생이별한 아이들은 신원 확인 보호자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고 허위로 작성된 원아 대장만을 가지고 선감학원에 수용됐습니다.

평범한 아이들에게 부랑아라는 낙인을 찍고 무려 40년간 운영된 선감학원. 1942년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져 1982년까지 유지된 선감학원.

그곳에 수용된 아이들은 무려 4,689명에 발했다. 그러나 이 숫자조차 정확한 숫자인지도 알 수 없다.

선감학원 아이들은 어둠이 내리면 들리는 곡괭이 자루 끄는 소리에 바들바들 떨었다. 이 소리는 폭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답니다.

그리고 선감학원 원생들은 이보다 더한 짓도 당했다. 입에도 담을 수 없는 일을 당한 아이들은 힘들 때마다 엄마를 떠올렸다.


또한 아이들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탈출에 성공하는 애들은 극히 소수였다. 탈출을 시도하다 잡혀 매질을 당하거나 갯벌 상태일 때 뭍으로 가다 밀물이 들어와 그 물살에 휩쓸려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찰떡 형제 중 형은 동생을 생각하며 견디려고 했지만 고통이 너무 심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고 했다. 죽으면 괴로움이 끝날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그렇게 형은 약을 하나씩 모았고 이를 다 털어 넣던 그때 직원이 이를 막았다.

그리고 그 후 찰떡 형제는 다른 시설로 옮겨졌다. 극단적인 상황이 생겨야 선감학원을 나갈 수 있었던 것.

영수 씨는 수차례 탈출시도했고 선감학원에서 3년이 흐른 날 다른 시설로 이동하던 중 달아났답니다.

당시 선감학원을 취재한 기자는 내부 제보를 받아 선감도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직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아이들에게 인권 유린이 행해진다는 것을 알아채고 이를 보도했다. 그러나 6년이 지난날 다시 방문한 선감학원은 무엇하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몇 차례 문제점이 보도되었지만 개선되는 것은 없었던 것. 이는 이 문제를 알고 있는 이들이 묵인하고 방치했기 때문이었답니다.

찰떡 형제는 각각 시설에서 도망을 쳤고 다시 만났다. 그리고 진짜 부랑아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가족을 다시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영수 씨 가족을 찾으려 애썼지만 만나지 못했다. 그러던 40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형을 다시 만났다.

한눈에 형제임을 알아본 두 사람. 영수 씨는 형에게 자신을 찾았는지 물었다. 이에 그의 형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영수 씨를 그리워하며 눈물로 지새웠음을 밝혀 안타까움을 자아냈답니다.

형을 만나기 불과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묘를 찾은 영수 씨. 그는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하다는 말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일용 씨는 가족을 찾지 못했고 찰떡 형제는 다행히도 가족을 찾았다. 그러나 찰떡 형제의 형은 아직도 가끔 선감도를 찾아가고 있었다.

당시 외로움을 함께 견뎌냈던 친구 망치가 그곳에 남아있기 때문. 그리고 지난해 그는 친구를 찾았답니다.

선감학원 피해자들의 유해와 유품들 중에서 망치의 유품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항상 함께 굴을 까먹을 때 썼던 굴 까던 도구를 찾아낸 것이다.

그렇게 현장으로 찾아간 형은 친구의 유해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최근 선감학원의 유해 발굴을 직접 추진하기로 한 경기도. 그리고 진화위에서는 선감학원과 관련된 기관에 모두 인권 유린 책임이 있다며 공식적 사과를 권고했습니다.

현재 선감학원 피해자들은 지원금도 받을 수 있게 된 상황. 하지만 도의 예산이라 경기도 거주자만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아쉬움을 자아냈다.

국비 지원을 계속 추진 중이지만 현재 그 일정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는 상황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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