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 선감도로 끌려간 아이들 "우리는 부랑아가 아니다"…그들이 그곳에 간 이유는?
-2024. 4. 19
18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그 섬에 아이들이 있었다'라는 부제로 선감 학원에 간 아이들의 그날을 추적했다.
2016년 7월, 허일용 씨는 한 야산에서 굴착기까지 동원한 발굴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온 뼛조각 일부와 신발을 본 그는 자신의 쌍둥이 형 같다고 했습니다.
그의 쌍둥이 형은 여덟 살의 나이로 사망해 50년 만에 유해로 발견된 것. 대체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비극을 맞은 것일까.
1960년대 초, 미아리에 살던 일용 씨와 그의 형은 할머니와 함께 시장 나들이를 나섰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할머니 손을 놓쳐버렸다.
그들 앞에 등장한 경찰. 형제는 집을 찾아달라고 했고 금세 집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 그러나 이들은 미아보호소 등을 거쳐 선감도라는 작은 섬에 도착했답니다.
1969년 여름, 할머니댁에서 지내던 찰떡 형제는 수원역에서 큰 형과 놀다가 형이 일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 역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이들은 경찰들에 이끌려 어딘가로 갔다. 미아보호소를 거쳐 어딘가로 이동하는 차. 형제는 할머니집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내려달라고 했지만 아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매질뿐이었다. 그리고 이들도 역시 선감도에 도착했다.
수원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중, 엄마가 화장실 간 사이 경찰들은 영수 씨를 어딘가로 데려갔다.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는 영수 씨의 이야기에 경찰은 엄마도 조금 있다가 오시기로 했다고 했다. 그러나 영수 씨가 도착한 곳 역시 선감도였습니다.
그리고 영수 씨는 선감도로 오는 도중 "여기서는 너희 자립시켜 주고 좋은 기술을 가르쳐줄 거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떠올렸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선감도의 선감학원.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곳에 왔으며 일용 씨의 형은 왜 사망했을까. 일용 씨는 형의 이상했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답니다.
숙소에서 숨진 채 발견된 형은 입에 담요 조각을 잔뜩 물고 죽었다는 것. 그의 형은 굶주림에 담요 조각을 먹아다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50년이 지난 후에야 찾았다는 것.
시신이 암매장된 곳에는 분묘가 150구 묻혀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곳에 묻혀있는 이들은 선감학원의 피해자들. 사망 원인은 알 수 없으며 그 인원도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선감학원이 밝힌 사망 인원은 20명이지만 분묘는 150구랍니다.
선감학원에 온 아이들은 그중 일부만 학교에 보내지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노역에 동원됐다. 무려 5000평의 염전을 농지로 개간하는 일을 하고 노동 할당량을 못 채우면 매질과 처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감학원을 운영한 이는 대부분이 공무원이었다. 또한 원생들 안에 서열을 나눠 아이들을 관리하도록 했답니다.
폭행과 강제노역에 시달린 아이들은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단무지와 새우젓이 그들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반찬이었으며 늘 굶주림에 시달린 아이들은 흙을 파먹고 오물을 먹고 나무 열매, 굴, 메뚜기, 쥐, 개구리 등 섬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다 먹었다.
이 아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부랑아라는 것. 선감학원은 부랑아 수용시설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부랑아가 아니었다. 정부는 법률적 정의와 단속 기준이 없이 아이들을 수집했다. 가족과 생이별한 아이들은 신원 확인 보호자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고 허위로 작성된 원아 대장만을 가지고 선감학원에 수용됐습니다.
평범한 아이들에게 부랑아라는 낙인을 찍고 무려 40년간 운영된 선감학원. 1942년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져 1982년까지 유지된 선감학원.
그곳에 수용된 아이들은 무려 4,689명에 발했다. 그러나 이 숫자조차 정확한 숫자인지도 알 수 없다.
선감학원 아이들은 어둠이 내리면 들리는 곡괭이 자루 끄는 소리에 바들바들 떨었다. 이 소리는 폭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답니다.
그리고 선감학원 원생들은 이보다 더한 짓도 당했다. 입에도 담을 수 없는 일을 당한 아이들은 힘들 때마다 엄마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