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현 CJ그룹 회장의 어머니 손복남 CJ 고문이 5일 오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이날은 CJ그룹(창업 당시 제일제당)의 창립 69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고인은 삼성그룹 창업주인 호암 고(故) 이병철 선대회장의 장남 고 이맹희 CJ 명예회장과 1956년 결혼하면서 삼성가와 인연을 맺었다. 경기도지사를 지낸 고 손영기씨의 장녀로,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의 누나다. 이재현 CJ 회장과 이미경 CJ 부회장, 이재환 재산홀딩스 회장 등 3남매를 뒀다.
재계 관계자는 “고인은 총명한 머리와 곧은 심성으로 일찌감치 이병철 회장의 총애를 받았다”며 “이 선대회장은 집안 대소사를 꼭 맏며느리인 고인과 상의했다”고 전했답니다.
“스스로 능력 입증해라” 장남에 특히 엄격한 분!
고인은 1970년대 중반부터 시부모인 이병철 회장 부부를 모시며 3남매를 키웠다. 특히 장남인 이 회장에게 엄격했다. 실력과 인성 면에서 손색 없는 경영자로 키우려는 일념에 “항상 겸손해라. 스스로 능력을 입증해라. 일 처리에 치밀하되 행동할 때는 실패를 두려워 말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CJ 관계자는 “이병철 선대회장이 장손인 이재현 회장을 유달리 사랑하고 신뢰한 근저에는 고인의 이런 노력이 있었다”며 “고인이 있었기에 이 회장이 제일제당을 물려받게 됐고 이는 CJ그룹 출범의 근간이 됐다”고 말했습니다.
고인은 그룹 출범을 지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제일제당이 글로벌 생활문화그룹으로 도약하는 기점마다 중요한 역할을 했다. CJ가 문화사업에 진출하는 계기가 된 미국 드림웍스 지분 투자(1995년) 당시 손 고문은 창업자 중 한 명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을 집으로 초청해 직접 음식을 대접하며 성공적 협력 관계가 이뤄지도록 분위기를 이끌었다.
비비고엔 “외국인도 부르기 좋다”며 지지
2010년대 초반 글로벌 한식 브랜드 이름을 ‘비비고로’ 정할 때도 “외국인들도 부르기 좋고 쉽게 각인되는 이름”이라며 힘을 실어줬다.
CJ가 ‘K푸드’ 확산을 꿈꾸며 2017년 개관한 연구개발(R&D) 허브 CJ블로썸파크를 구상할 때는 이재현 회장과 함께 주요 후보지를 둘러보며 주변 인프라와 시너지가 예상되는 현재의 경기도 수원시 광교를 지목하기도 했습니다.
이 회장은 그런 어머니를 “CJ그룹 탄생의 숨은 주역”이라며 “내가 그룹 경영자로 자리 잡는데 든든한 후원자셨다”고 했다. CJ 측은 “고인은 말년까지도 그룹 경영진과 가족이 항상 성장하며 발전하도록 하는 화합과 교류의 든든한 구심점이었다”고 밝혔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 중구 필동 CJ인재원에 마련됐다. CJ인재원은 이 회장이 어린 시절 고인과 함께 살던 집터로, CJ그룹 창업 이후 인재 양성을 위해 만든 곳이다.
한편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6일 오전 모친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과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재계 관계자는 “홍 전 관장과 고인이 각별한 사이였다”고 말했다. 이 회장의 조문을 시작으로 삼성·신세계 등 범삼성가 오너 일가를 비롯해 정·재계 조문이 이어질 전망이랍니다.
CJ 관계자는 “사회 분위기를 감안해 검소하고 차분하게 장례를 치르겠다는 것이 가족들의 뜻”이라고 밝혔다. 발인은 8일 오전 8시 30분, 장지는 경기도 여주시 선영이다.
이재현 회장 모친 손복남 고문 뇌경색 입원 - 2015. 12. 28
손복남(82) CJ그룹 고문이 뇌경색으로 쓰러져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척추 수술을 받고 서울대병원에 입원 중이던 손 고문은 지난 19일 같은 병원에 입원 중인 이재현 회장을 만난 뒤 쓰러진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손 고문은 6개월 전부터 이 회장이 입원해 있는 특실 병동에 함께 입원해 있다가 뇌졸중이 와서 본관 특실병동으로 옮겨 치료를 받고 있다.
28일 병원 관계자에 따르면 고령인 손 고문은 지병이 있어 위중한 상황은 맞지만 아주 위독한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 의사소통은 불가능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은 감염 문제를 우려해 지난 27일에서야 손 고문의 병실을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은 지난 15일 파기환송심에서 실형을 선고 받고 구속정지집행 상태로 서울대병원에 입원 중이랍니다.
손 고문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장남인 고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의 부인이다.
- 이병철의 시아버지인 이병철의 프로필 이력 경력
출생 1910년 2월 12일(나이) 고향 출생지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사망 1987년 11월 19일(77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
학력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
경력 삼성그룹 창업자 한일경제협회 고문 직업 기업인, 정치인
종교 원불교 부모(아버지 어머니) 이찬우, 권재림 형제 이병각, 이명점, 이병윤
배우자 부인 아내(와이프) 박두을(원배), 구로다(재취) 자녀 4남6녀
삼성그룹과 CJ그룹, 한솔그룹, 중앙일보를 창업한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1938년에 삼성상회를 세웠으며 이후 무역업에도 종사하였다. 1951년에는 삼성물산을, 1953년에는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했고, 수출을 통해 제조업을 확장하여 삼성중공업, 삼성물산, 삼성석유화학 등 삼성그룹의 기반을 닦았다.
1964년 5월에 TBC를, 다음해 9월 중앙일보를 창설하여 방송과 언론에도 진출하였다. 그러나 중앙일보는 사돈인 홍진기 일가에게 넘겼다. 그 뒤 기업 활동에 전념하여 1969년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설립하여 전자제품의 수출에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병철은 1910년 2월 12일에 경상남도 의령에서 이찬우와 어머니 권재림 사이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로 16대조 계번(桂蕃)이 입향조로써 경남 의령에 정착하여 거주지로 삼으면서 의령, 진주에 거주한 집안이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도 한성을 오고가며 벼슬을 한 양반들에게 물건을 팔며 장사를 했으며, 독립협회와 기독교 청년회에도 참여하였다. 이병철은 평민의 후손으로 신분제도 철폐를 주도하기도 했다.
평민 신분이었으나 어려서 할아버지 이홍석 훈장이 세운 서당인 문산정(文山亭)에서 천자문, 사서삼경, 논어(論語) 등을 배웠다. 1919년 3월 한학 수학을 인정받아 진주군 지수면에 있는 지수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습니다.
1920년 11살에 지수공립보통학교 4학년 당시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경성의 수송공립보통학교로 전학을 갔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심한 경상도 사투리 때문에 경성 지역 학생들과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곧 학교 생활에 적응, 중동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학습진도가 올라 우수한 성적을 거두게 된다. 이후 1926년에 박팽년의 후손인 박기동의 4녀 박두을과 고향에서 결혼하였다. 자서전인 《호암자전》에서는 1929년에 결혼하였다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1926년에 결혼하였다.
결혼식을 마치고 상경하여 다시 학교에 다니며 학업에 열중하다 4학년 1학기 무렵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이병철은 부모한테서 자신의 일본 유학에 대해 반대받았으나 옆 동네에 살던 효성그룹의 창업주인 조홍제를 찾아가 사정했다. 일본 유학 경비 500원을 빌려달라고 부탁하면서 조홍제가 흔쾌히 수락, 조홍제의 도움으로 그와 함께 일본에 유학하였다.
중동중학교를 졸업한 후 1929년에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유학 초기 한동안 책에 빠졌다가 틈만 나면 곳곳의 공장을 방문해서 일본 공업의 실상을 자주 살펴보았다고 한다. 대학 시절부터 이병철은 기업인의 꿈을 꾸게 되었고 유학 시절 고향에서 매달 생활비로 200원을 송금해왔는데 이때 당시 일본 중산층 가정의 한달 생활비가 50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풍족한 편이었습니다.
대학 시절 이병철은 공부에 열중하고 스스로 충실하게 생활했으나, 1학년 때 건강 악화로 쉽게 지치고 조금만 책을 읽어도 쉽게 피로해지는 증상이 생겨 휴학계를 내고 온천을 찾아다니며 병을 치료하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후일 회고에서 그는 "공부해서 무슨 벼슬을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단지 도쿄의 신학문이 어떤 것인지도 알았고 그 사람들의 생각도 알게 되었으니 유학생활을 더 하면 뭣하나 싶은 회의가 들었다."며 1931년에 자퇴하고 귀국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와 요양하면서 이병철의 건강은 회복되었다. 고향에서 특별히 할일 없이 무위도식하던 이병철은 친구들과 노름판에 빠졌다. 밤새 노름에 빠져 달 그림자를 밟으며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고 이병철 스스로 회고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와 마찬가지로 노름을 하다 집으로 돌아와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3명의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이병철은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충격을 받았답니다.
훗날 회고에 의하면 그는 "그야말로 허송세월이었다. 어서 빨리 뜻을 세워야 한다."는 회한과 두려움에 며칠 꼬박 새웠으며, 자신에게 맞는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사업을 하겠다고 결심을 굳힌 그는 며칠 후 아버지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별말 없이 아들에게 선선히 사업자금을 내주었다
그는 장사를 할 곳으로 경성부터 부산, 대구 등지를 직접 물색하여, 생각해 보았으나 고향 인근의 포근 항구 마산이 떠올랐다. 쌀을 생각한 그는 마산은 조선 각지에서 생산한 쌀을 수집하여 도정해서 일본으로 보내는 도정공장이 있는 것을 알아냈고, 도정공장은 수 백 가마니씩 도정을 기다리는 벼덤이들이 있었다. 바로 그는 친구 2명과 힘을 합쳐서 동업으로 정미소를 차렸습니다
그 뒤 1938년 3월 29세에 30,000원(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한달월급 약15원꼴(166년 일해야되는 돈)의 자본금으로 대구 수동에서 〈삼성상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사업을 시작하였다. 1941년 주식회사로 개편하고 청과류와 어물 등을 생산자로부터 공급받아 도매, 소매업과 수출 등도 하면서 중국에도 수출하기 시작하였다. 1942년 조선양조를 인수하여 함께 운영하던 중 광복 후 1947년 경성으로 상경하여 다음 해 삼성물산공사를 창설하고 무역업에도 참여하였다.
1950년 초 일본공업시찰단원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어 출국, 일본 내 제조업, 수공업 등 일본의 공업계와 전후 공업시설 복구 현장을 직접 시찰하고 귀국했으나 그해 6월 25일 서울에서 한국 전쟁을 맞았다. 전쟁 직후 피난을 떠났다가 1951년 무렵 부산에서 다시 삼성물산을 세워 다시 무역업에 본격 뛰어들면서 1953년에는 제조업에도 투자하였습니다.
1953년에 제일제당, 1954년에 제일모직을 설립, 제조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제조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면서 사업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동방생명, 신세계백화점, 안국화재보험, 전주제지 등을 인수, 경영하였고, 성균관대학교의 재단 이사로도 교육사업에 투자하기도 했다. 이후 사업 영역을 크게 확대해갔으며 중앙개발, 고려병원 등을 인수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1961년부터 1987년까지 한국경제인연합회의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1964년초 한국비료를 인수 운영하였으며, 1964년 5월 동양라디오, 텔레비전 동양방송을 설립하여 방송에도 진출했고, 그 해 대구대학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1965년 9월 중앙일보를 창설하여 언론사에도 진출하였다. 그러나 중앙일보 등은 사돈인 홍진기에게 넘겼다. 동양방송은 1980년 언론통폐합이 될 때까지 운영하였습니다
복귀와 기업 활동
그러나 1966년에 사카린 밀수가 적발되면서 물의를 빚게 된다. 1966년 11월 한국비료의 상무로 있던 차남 창희가 서울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후 1968년 2월 이병철은 다시 경영에 복귀하였다.
그 뒤 모직회사가 성장하면서 1972년 7월 제일모직 경산공장을 분리하면서 합성섬유를 제조하는 시설을 갖추어 제일합섬을 설립했고, 1969년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설립하여 삼성그룹 육성의 도약대를 만들었다. 1974년 삼성석유화학, 삼성중공업을 설립하여 중화학 공업에 진출하였고,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당시 수출위주 경제 성장 정책에 맞추어 전자제품, 화학제품과 중공업 등의 대량 해외 수출을 통해 막대한 부를 창출하여 대기업으로 성장시키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삼성정밀·용인자연농원 등을 설립하였다.
1975년 5월 특별히 제일합섬의 공장 시스템을 공개하기도 했다. 제일합섬은 1982년부터 새한그룹을 차려 분가한 차남 창희에게 서서히 넘겨주었다. 1977년 5월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합병하여 삼성전자로 단일화하고, 1984년 8월 상호를 삼성전자 주식회사로 바꾸었다. 삼성전자는 그의 사후에도 삼성그룹 성장의 기반이 되었다.
말년과 사망
1976년에 위암 판정을 받았으나 수술을 받고 건강을 회복하였고, 이후 삼성정밀 등을 설립하고 1982년 삼성반도체통신을 설립하였다. 이 밖에도 문화재단·장학회 등을 설립하였고, 백화점·호텔 등의 경영에도 참가해서 사업의 다각화를 통하여 국가경제 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1981년 2월 한일경제협회 고문에 위촉되었고 이듬해 다시 재위촉되었다.
미술에 심취했던 이병철은 많은 소장품을 수집하거나 소장해 오다가 호암미술관을 건립하였고, 국악과 서예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1977년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이 되었으며, 현대그룹 회장이었던 정주영 등과 함께 울산에 공단을 조성하는 데에도 일정부분 투자하거나 기부를 하여 설립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는 후에 울산공단으로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1985년에 폐암 판정을 받았고, 이후 금탑산업훈장을 비롯하여 세계최고경영인상을 받았다. 1987년 11월 초 이병철은 한일경제협회 고문직을 사퇴하고 같은 달 19일에 7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묘소는 현재 용인에버랜드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병철 34주기] '호암정신'으로 뉴삼성 속도 낸다 - 2021. 11. 19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故) 호암 이병철 선대회장의 34주기를 맞았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미국 출장 일정으로 추도식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글로벌 경영 행보에 집중하며 '뉴삼성'에 힘을 싣는 모습이다.
19일 재계에 따르면 이날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 인근 선영에서 이병철 선대회장의 추도식이 진행됐다. 1910년 2월 12일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난 이병철 선대회장은 1987년 11월 19일 향년 78세로 별세했다.
이병철 선대회장은 반도체 산업에 도전해 '반도체 코리아' 초석을 다진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1983년 '도쿄 선언'을 통해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 선언했다. 당시 우리나라가 반도체 불모지였던 만큼 주변의 만류가 있었지만,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며 사업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이병철 선대회장은 직원들에게 "영국이 증기기관을 만들어 400년간 세계를 제패했는데, 나도 그런 생각으로 반도체에 투자한 것"이라는 유훈을 남기기도 했다.
이병철 선대회장의 대표적 경영철학으로는 '사업보국'이 꼽힌다. 기업을 통해 국가에 헌신하고 봉사한다는 뜻으로, 현재까지도 삼성에 계승되고 있다.
실제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해 이병철 선대회장의 33주기 추도식 이후 계열사 사장단과 가진 오찬 자리에서도 "늘 기업은 국민경제에 도움이 돼야 하며, 사회에 희망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던 회장님의 뜻과 선대회장님의 사업보국 창업이념을 계승 발전시키자"고 강조한 바 있답니다.
다만 이 부회장은 미국 출장으로 인해 이번 추도식에는 불참했다. 이 부회장은 지난 2014년 고(故)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이후 사실상 총수 일가를 대표해 추도식을 주재해왔다. 하지만 올해는 추도식을 위해 귀국을 앞당기기보다는 현지에 머물며 정·재계 인사를 만나고, 현지 경영 현안들을 챙기는 것으로 선대회장의 사업보국 정신을 기렸다.
이 부회장은 그동안 매주 목요일 삼성물산 합병, 삼성바이오로직스 부정회계 의혹 관련 재판에 참석해야 해서 시간을 내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번엔 대학수학능력시험 일정으로 18일 재판 일정이 잡히지 않으면서 모처럼 시간을 낼 수 있게 됐다.
지난 14일 5년 만에 북미 출장길에 오른 이 부회장은 가장 먼저 캐나다에 있는 삼성전자 인공지능(AI) 연구센터를 방문했다. 이후 바이오 기업 모더나와 이동통신 기업 버라이즌 경영진을 잇따라 만나며 글로벌 경영을 재개했다
바이오 사업은 이 부회장이 '제2의 반도체 신화'를 만들겠다며 투자를 집중하는 분야이기도 하다. 삼성은 바이오 사업을 시작한 지 9년 만에 바이오 의약품 위탁개발생산(CDMO) 공장 3개를 완공했으며, 현재 건설 중인 4공장이 완공되면 삼성바이오로직스는 CDMO 분야 업계 1위에 올라서게 된다.
삼성은 바이오 의약품 외에 백신, 세포·유전자치료제 등 차세대 치료제 CDMO에도 신규 진출할 예정이다. 또 바이오시밀러도 파이프라인을 지속 확대하고 고도화하는 데 집중 투자할 계획이다.
또 삼성은 세계 최초 5G 상용화를 달성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차세대 통신 기술 선행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통신망 고도화·지능화를 위한 소프트웨어 역량 강화에 집중 투자하고, 차세대 네트워크사업 리더로 성장하기 위한 신사업 영역과 제품 포트폴리오 확장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재계에선 이 부회장의 남은 일정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20조원 규모의 미국 파운드리 투자 계획을 확정하고, 최근 반도체 정보 제출을 요구한 미국 정부 관계자들과 만나 국내 반도체업계의 입장을 전달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답니다.
재계 관계자는 "그동안 이 부회장이 사법 리스크로 인해 글로벌 경영에 나서지 못했던 만큼 이번에 경영 현안을 해결하는 데 집중할 것"이라며 "특히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는 데 적극 나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아울러 삼성전자가 대대적인 인사제도 개편에 나선 점도 '뉴삼성'을 가속하는 요인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인사제도는 직급 체계 단순화, 과감한 인재 발탁 등을 골자로 개편될 것으로 전망된답니다.
재계 관계자는 "인사 제도 개편을 통해 이 부회장이 추진하는 '뉴삼성'의 방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인사 제도가 5년 만에 바뀌는 것인 만큼 삼성전자는 물론 그룹 전반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고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