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 "여성 위해 평생을 살아오신 한명의 위인 보내드리고 있다"..김대중 전 대통령 '동지' 이희호 여사 별세
- 2019. 6. 11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생 동반자였던 이희호 여사가 10일 오후 11시37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습니다. 향년 97세였는데요.
고(故) 이희호 여사는 '김대중 부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김 전 대통령은 스스로를 '이희호 남편'이라 칭할 만큼 둘의 관계는 부부라기보다 '동지' '동업자'에 가까웠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미국에서 망명하던 시절인 1983년 샌프란시스코의 한 강연에서 이같이 말하기도 했답니다.
“아내가 없었더라면 내가 오늘날 무엇이 되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내가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내 아내 덕분이고, 나는 이희호의 남편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이희호는 1922년 서울에서 6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어머니의 교육열에 힘입어 이희호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1936년 진학했는데요.
졸업 후 이화여전(이화여자대학교)을 다니던 이희호는 2년 다닌 뒤 강제졸업을 당했습니다. 이후에 이화여대에 편입을 요청했지만 실패하고 1946년 서울대 영문과에 입학했습니다. 서울대 재학 당시 이희호의 별명은 독일어 중성 관사인 '다스(das)'였다고 합니다. 행동이 여성 같지 않고 중성적이었다는 의미였는데요.
당시 이희호는 기독교청년학생운동에 적극적이었습니다. 각 대학의 학생 리더들이 만든 '면학동지회'에도 참여하면서 사회운동에 발을 들였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 피난을 갔던 이희호는 이곳에서 대한여자청년단을 만들었는데요. 이희호는 이 무렵부터 여성이 주체가 되는 사회운동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1952년에는 대한여자청년단에 이어 여성문제연구원도 창립했습니다.
서울대생 모임이었던 면학동지회 역시 1951년 부산에서 다시 회동했는데요. 한 달에 한 번 만나던 이 모임에서 이희호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처음 만났습니다.
◆이희호 여사, 면학동지회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처음 만나
1954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후 석사과정까지 마치고 1958년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고국으로 돌아온 이희호는 모교였던 이화여대에 둥지를 틀고 기독교사회사업학과에서 사회학 원서 강독을 했습니다. 대학교수를 희망했던 이희호는 YWCA(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 측으로부터 총무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는데요. YWCA에서 중추적인 활동을 하며 사회운동가로의 명성을 쌓아갔습니다.
김대중을 다시 만난 건 1961년이었습니다. 김대중은 당시 첫 부인이던 차용애를 먼저 떠나보낸 상태였는데요.
5•16 쿠데타로 의원직을 잃은 '정치 실업자' 김대중과 YWCA 총무였던 이희호는 주로 정치 이야기를 하며 가까워졌습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두 사람 사이에 '동지애'가 싹텄다고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김대중과 이희호는 1962년 결혼했습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이 재혼인 데다가 5•16 군사 쿠데타로 정치생명을 잃었기에 주변에서 결혼을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정치 낭인이었던 김대중의 앞길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했는데요. 결혼식을 마치고 열흘 뒤 김대중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갈 정도였습니다. 평생을 김대중의 정치적 동반자로 산 이희호의 고난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평생을 김대중 '정치적 동반자'로서 살았던 이희호
정치인 김대중의 뒷바라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이희호는 사회운동가로서의 삶은 접게 됩니다. 이희호가 기억하는 가장 고된 선거는 1967년 총선이었습니다. 주위에서는 지방 지역구는 부정선거가 이뤄지기 쉽다며 김대중의 목포 출마를 만류했지만, 결국 김대중은 목포 출마를 결심했고 이희호도 나서 지원했습니다.
1970년 김대중은 처음으로 대선에 나갈 결심을 했습니다. 40대 기수로 나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기는 날이 갈수록 올라갔는데요. 부산 연설에는 50만 명의 시민이 몰렸습니다. 김대중이 하루에 열 차례가 넘는 연설을 하면 이희호 역시 전국의 장터와 거리를 돌며 남편을 도왔습니다. 이희호는 찬조연사로 나서 시민들에게 "제 남편이 대통령이 돼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다"고 호소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4월18일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열린 김대중의 유세에는 100만 인파가 모여들었지만, 결국 제7대 대선은 박정희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대선이 끝나자마자 김대중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됐는데요.
1972년 유신 쿠데타가 시작되자 야당 의원에 대한 본격적인 고문이 시작됐습니다. 교통사고 후유증 치료를 위해 일본 도쿄에 머물던 김대중은 10월 유신 소식을 듣고 귀국을 포기한 뒤 해외 망명을 결정했습니다. 이희호는 남편에게 편지로 응원의 메시지와 함께 국내 민심을 전했는데요. 엄혹한 상황에서도 남편의 투쟁 의지를 북돋았습니다. 그는 편지에 “현재로서는 당신만이 한국을 대표해서 말할 수 있으니 더 강한 투쟁을 하시라”고 적었습니다.
1973년에는 김대중 납치사건까지 벌어졌습니다. 김대중은 일본 도쿄에서 괴한 5명에게 납치당해 배로 끌려가 바다에 떨어져 죽을뻔한 위험을 겪습니다. 다행히 미국 정부에 배의 위치가 탄로나 김대중은 살아돌아올 수 있었는데요. 이희호는 매일 가슴을 졸이는 날들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고초 속에서도 남편에게 포기를 권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절 이희호를 붙든 건 간절한 신앙심이었는데요.